boys be ambitious!

개가 똥을 끊어라.

 

공부에 한해 작심 삼일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운학이었지만 김운학은 제가 흥미를 보이는 분야에 있어서는 곧잘 두각을 드러냈다. 운지법조차 헷갈리던 기타는 사흘 밤낮을 꼬박 붙들어 웬만한 코드는 죄 연주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고 처음 낭만이니 청춘이니를 운운하며 한꺼번에 대출했던 로맨스 소설들은 일주일 만에 완독했다. 참고서 한 문장도 버거운 김운학 니가 독서라니 지나가던 개새끼가 웃고 가겠다며 운학을 조롱하던 같은 반 급우들의 말들과 달리 운학은 입학 이후 25:1의 경쟁률을 제치고 밴드부에 기타 세션으로 입부했으며 봄방학부터 키워 온 취미였던 독서는 5월달이 넘어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주위에 사람이 가득했다. 놀려먹기 쉬운데 인간적으로 모난 구석 없는, 일축하자면 소년의 정수. 운학의 친구들은 하루같이 운학을 비아냥대기 바빴지만 반쯤은 장난 어린 마음임이 투명했다. 혀끝에 얄팍한 동정심이 어려 있었다. 아직 어린 김운학은 그 사실 모르고 마냥 장난 심한 친구들이라며 머쓱해하기 바빴지만 그럼에도 물러 터진 성격 탓에 화 한번 낼 줄 몰랐다. 언젠가 누군가 운학에게 너는 기분 안 나빠? 하고 물어왔지만 김운학은 특유 물러 터진 표정으로 싱겁게 웃어 넘기고 말았다. 그냥 친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놀리고 싶은가 보지.

 

놀리고 싶은 만큼 지독히 붙어먹고 싶은 김운학.

 

새 학기 버스킹 밴드부 세컨 기타, 점심 시간에 도서관 방문하면 창가 자리에서 연애 소설 들쑤시고 있는 이 달의 다독왕. 그런 수식에 곧잘 얼굴 붉히곤 하는 운학이었지만 형체 없이 운학을 사모하는 세력들은 그런 운학에게 늘상 의구심을 가졌다. 쟤는 저렇게 허우대 멀쩡한데 왜 연애를 안 하는 거야? 종종 흑심 품고 여자 친구 있냐며 다이렉트 메시지 날리면 김운학은 알쏭달쏭한 심중으로 하트 하나 찍었다. 팬 서비스는 톡톡히 제공하되 팬과는 연애 안 한다. 과연 교내 아이돌이라면 아이돌다웠다.

 

이여름은 이런 우화들을 더러 신화라고 치부하곤 했다.

 

그야 내가 사는 세상 얘기 아니니까, 먼 나라 이야기자 별세계 이야기였으니까. 고등학생들이 교내 무대에서 공연하는 음악이라고 해 봤자 끽해야 멜론 탑백 초상집 발라드? 예체능 학우들을 비롯한 요란스런 목소리들이 싫었다. 댄스부나 보컬 동아리의 미니 버스킹 따위는 여름에게 소음 발생원에 불과했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어 내리고자 점심 시간에 허겁지겁 급식을 때려 넣고 다급히 교실로 올라오면 교실 스피커에서는 케이팝 가요가 흘러 나왔다. 줄곧 시끌벅적한 아이돌 노래로 즐비한 플레이리스트를 매 점심 시간마다 디깅해 주는 방송부 전담 교내 방송이었다.

 

피신할 곳을 찾았다. 운동장에서는 축구하는 남학생들 욕지거리 짓씹는 효과음이 가득했고 열람실은 특유의 습기 가득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서관이라고 해 봐야 양아치들 눌러앉아서 핸드폰 게임 돌리는 스팟이겠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긴 학교 5층 도서관에서 여름은 그날의 계절과 장소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창가 수놓은 푸른 잎들 사이를 비집은 버석한 햇살, 미세한 세월감을 머금고 도서관에 머물다 간 저마다의 흔적을 껴안은 목재 의자와 모든 책장에 빼곡한 아날로그 종이책.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사람이 아닌 장소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던가. 언젠가 여름에게 학창 시절의 첫사랑을 묻는다면 여름은 결단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장소라고 대답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렇게 여름은 제 학창 시절의 역사를 5층 도서관과 함께 써 내려갔다. 그게 어느덧 2년 전이었다.

 

매일같이 도서관에 방문하는 여름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사서 교사의 제안에 여름은 3학년이 되며 부장 자격으로 도서부에 입부했다. 하는 일이라고는 청소가 끝이겠지 싶어 수험 생활은 방해받지 않을 심산으로 떠안게 된 도서부장 직위인데...... 어쩐지 가장 고요해야 할 고등학교 3학년에 여름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꾸만 적막을 방해받았다.

 

매일 아홉 시 전에 등교해 도서관 문 열기, 점심 시간 및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자리해 대출 도서와 반납 도서 관리하며 연체자 목록 확인, 종종 특정 장르 거론하며 책 추천해 달라는 문외한들에게 도서 추천해 주는 것은 물론 방과후에는 책장 청소. 이건 도서부장이라기보다 노예에 가깝잖아, 이것들아....

 

그럼에도 자신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좋았다. 1학년에 재학할 당시부터 늘상 이 공간이 나만의 것이길 바라 왔던 여름은 고된 직무에 지난 날을 후회하다가도 창문을 비집고 제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과 시선을 맞추다 보면 그래, 힘든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텅 빈 마음이 계절감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봄의 가운데서 도서관의 창문을 열면 꽃 내음이 가득 밀려왔고, 여름의 절정에서는 코끝까지 가득 차는 초록과 노랑, 코코아 위 마시멜로만큼이나 포근하면서도 어느 순간 시릴 만큼 차가울 줄 알던 가을과 겨울. 열두 번에 거친 계절의 순환을 가장 사랑하는 장소에서 맞이하는 것이란 흔해 빠진 연애 경험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이용하는 학생들이 적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종종 말수 적은 오타쿠들이 기어와 종합장 위에 이름 모를 캐릭터들을 그리며 예민한 눈가를 씰룩이곤 했지만 여름 역시 그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기에 크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본 투 비 리듬 게임 오타쿠였던 여름은 일본 서버의 걸즈밴드 리듬 게임에 n년 째 목을 매달고 있는 골수 유저였다. 종종 동질감이 스치기도 했고, 우리 같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도서관이라는 장소에 더욱 의지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눈엣가시는 대체 뭐냐.

 

부쩍 대출자 목록에 김운학이라는 이름의 출현 빈도가 늘었다. 한꺼번에 막대한 양의 도서를 빌려 가서 연체 없이 반납하기를 두어 번 정도 반복하더니 이제는 매 점심 시간마다 대놓고 도서관에 눌러 앉았다. 그다지 난해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주로 읽는 소설은 대개 로맨스 장르로 국한...... 딱 봐도 리얼충이군. 여름이 소리 없이 혀끝을 차댔다. 괘앤히 아싸들 서식지 침범하지 말고 나가서 공이나 차라, 애송아.

 

하는 바람과 달리 매일같이 도서관에 얼굴 도장 찍는 김운학에 여름은 이마를 짚었다. 아무렴 뭐 어때, 도서관이 개인 공간도 아니고. 제발 말만 걸지 마라...... 싶었는데 김운학은 끈덕지게 말을 붙여 왔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건 '애는 착해' 과의 푼수때기들이랬다. 인사성은 얼마나 밝은지 웃는 낯에 침 뱉기도 민망해 안녕하심까~ 하는 소리 들을 때마다 여름은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운학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대뜸 직각 인사를 박고는 생각해 보니까 쟤 나보다 동생일 거 아니야.... 집 가서 이불 좀 찼다는 속설은 이여름과 도서관만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비밀이다.

 

이 책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이랑 비슷한 책 추천해 주실 수 있슴까?

 

아~ 지난번에 추천해 주신 책은 너무 재미있게 읽었슴다. 혹시 비슷한 거 또 있나요?

 

질리지도 않고 방문하더니 끝내 스몰 토크까지 도전하신다. 엇, 안녕하세요! 또 뵙슴다. 이런 식으로 해맑기만 한 족속들은 이여름의 오랜 천적이었다. 눈치 같은 거라든가 타인의 의사 따위는 절대로 관심 범위에 두지 않은 주제 특유 무구함으로 호의를 무료 나눔 하고 다닌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애들. 운학 같은 대문자 ENFP들한테는 특히 넌더리를 내던 터라 여름은 운학이 말을 붙여 올 때마다 경련 인 입꼬리로 시원찮게 대꾸했다. 그래 안녕....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식으로 추천한 도서가 기가 막힌 도서부장 픽이었던 탓 김운학이 이여름의 도서 추천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은 간과해 버린 모양이었다.

 

어김없이 지난주에 대출한 도서 다섯 권을 끌어안고 방과 후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긴 운학이 불이 꺼진 도서관 전경에 눈을 꿈뻑댔다. 저어, 아무도 안 계십니까아....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에 손길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는데, 이건가? 운학이 손을 헛디디며 스위치를 누르자 한꺼번에 조명이 들어온 도서관에 목재 테이블 중앙 자리서 엎드린 채 잠을 청하고 있던 여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눈 아파....

 

헉, 여름 선배!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합주 가기 전에 급하게 반납하러 온 길이라, 불이 다 꺼져 있어서 놀라...."

 

 

 

가지고....

 

어....... 여름 선배 맞죠?

 

여즉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운학에 여름이 졸린 눈을 꿈뻑였다. 맞는데... 너 어디 아파? 여름이 운학의 뺨가에 손을 덧대자 타는 듯한 열기가 여름의 손바닥을 감쌌다. 몇 초 벙찐 채 화들짝 어깨를 들썩이며 여름에게서 떨어진 운학의 표정이 잔뜩 곤혹스러웠다. 이,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표정이 왜 그래?"

 

"그, 그...... 안경, 안경 쓰는 거 까먹으셨슴다."

 

"아."

 

 

 

운학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안경을 걸쳐 올린 여름이 두꺼운 렌즈 사이로 타오르는 운학의 얼굴색을 응시했다. 도서 반납하러 온 거 아니야? 왜 멍청하게 그러고 있어.

 

떨리는 손으로 반납대에 대출했던 소설책을 내민 운학이 수상하다는 기색으로 맞닿는 여름의 눈길을 계속해 회피했다. 요리조리 움직이는 운학의 눈동자를 좇던 여름이 운학의 학생증 뒷면에 자리한 바코드를 인식한 뒤 운학에게 학생증을 되돌려 주었다. 여름이 내민 아이디 카드를 돌려 받으며 짐짓 손가락이 스치자 허억, 입을 틀어막는 운학에 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어디 안 좋니.

 

 

 

"아니, 아니요...."

 

 

 

아님다, 누나주무시는데방해해서진짜죄송했고다음에또올게요안녕히계세요!!!

 

줄행랑을 치는 운학의 뒷모습에 여름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렇게 산만해서야.... 어쩐지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 주욱 볼을 밀어 젖히다 말고 여름은 다시금 몰려오는 피로감에 한 번 더 지긋이 눈을 붙였다.

 

한편 운학의 머리 한가운덴 커다란 경고 창이 드리웠다.

 

고심박수입니다! 복도 한가운데서 경보를 울리는 스마트 워치 알림음에 운학이 다급히 버튼을 연타했다. 암만 스크린을 때려 눌러도 그치지 않는 경보음에 홧홧한 기색의 운학이 끝내 스마트 워치 전원을 해제해 버렸다. 방금, 방금 뭐야? 완전...... 완전 어렸을 때 만화 영화에서만 보던, 딱 그거잖아.

 

두꺼운 안경에 답답한 헤어 스타일을 고수하던 여자 주인공이 안경을 벗어 던지자마자, 사슴 같은 눈망울과 안경 중앙 부분에 가려진 오똑한 콧날, 오밀조밀 앙증맞게 들어찬 입술이 후광 효과와 함께 더불어 분홍색 컨페티까지 날리는 연출.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직전 여름의 얼굴은 운학이 꿈꿔 왔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너는 여자 친구 안 사귀냐?

 

나는 기타랑 결혼했지, 인마.

 

킥킥 웃으며 반려 기타를 끌어안은 운학의 옆구리를 에라이 새끼야, 적당한 세기로 걷어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친구들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여자 친구를 사귀어야 하지? 왜 반드시 연애를 해야 하는 거야? 연애든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학창 시절 보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나는 여자 꼬시려고 음악 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무언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합주실에 거의 가까워져 가던 운학이 급히 유턴을 때려 다시 한 번 5층 도서관까지 전력으로 질주했다. 도서관의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가방을 챙겨 돌아서는 여름의 실루엣이 멀리서 아른거리자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허파를 어렵사리 잡아 챈 운학이 여름의 어깨를 붙들었다. 놀란 표정의 여름이 눈을 꿈뻑이자 가쁜 숨을 헐떡이던 운학이 선배, 그, 저기.... 하고 물꼬를 텄다.

 

 

 

"괜찮으니까 진정해."

 

"그게, 그...... 물어볼 게 있어서, 후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좋아하는 노래, 있으세요?

 

너 지금 이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거야? 여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운학을 올려다보자 무릎을 굽히고 헐떡대던 운학이 여름을 보챘다. 저 남은 시간 없어요. 빨리요.

 

 

 

"그냥......."

 

"그냥?"

 

"제이락 좋아해."

 

 

 

제이락이요? 무슨 제이락이요?

 

뱅드림이라고 알아...?

 

아니요.

 

오케이.

 

교복 바지에 찔러 넣었던 휴대 전화를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한 운학이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고는 지하 밴드부실로 뛰어 내려갔다.

 

여자 꼬시려고 음악 하는 건 아니지.

 

그런데 음악 해서 여자 꼬실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야?

 

늦어서 죄송함다! 다급히 합주실로 들어서 앰프에 기타를 연결한 운학이 삼 년 간 동거동락한 전자 기타를 안아 들고는 생각했다. 너, 내 반려자 타이틀 그만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야겠어.

 

3년이면 지독히도 붙어먹었지. 니가 형 여자 친구 생기게 도와주는 거야. 하얀 천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던 드라마 대사를 유일하게 비웃지 않는 이 시대의 낭만파, 성한 몸과 기타 한 대만으로 얼마든지 난생 처음 시작된 첫사랑을 성공에 이르도록 하리라. 굳은 다짐을 품에 안은 운학이 손에 쥔 피크로 기타의 6번 줄을 튕겨 올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잠시 선잠에 빠져들었던 제 모습을 발각한 뒤로 매번 독서실을 찾는 김운학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3년 내내 도서관에 박혀 사람들 오가는 것 지나다니며 키운 건 눈치뿐이라 여름은 한눈에 운학의 태도가 변화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체 속내 숨기는 것에 젬병이었던 터라 웬만한 눈치 고자 아니면 단칼에 간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드물게 맞닥뜨리는 시선을 피하고 어색한 헛웃음을 토해 낸다. 도서관 내에서는 정적이 오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음에도 둘 사이 정적이 드리우면 큰일이라도 생긴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영양가 없는 주제로 말을 붙여 왔다.

 

 

 

"누나."

 

"야."

 

 

 

헉, 누나가 먼저 말씀하세요. 얼굴이 정면으로 맞닿자 금세 뺨을 붉히고 시선을 내리깐 운학이 입꼬리를 씰룩대며 대답했다. 참다 못한 여름이 눈을 질끈 감고는 미간을 짓눌렀다. 너 대체 평소에 뭐 해?

 

 

 

"안 바빠? 평소에 뭐 하는데 매번 도서관에서.... 공부는 안 해?"

 

"네, 공부는 안 하는데요."

 

"그래."

 

 

 

요즘 애들 이렇게 당당한가? 모름지기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거늘.... 도리어 말이 없어진 여름이 입술을 비죽이자 샐쭉 웃어 보인 운학이 우쭐대며 덧붙였다. 대부분 일과 시간은 동아리 합주 아니면 개인 연습에 쏟아요. 밴드부거든요. 진로도 그쪽으로 준비하고 있슴다.

 

순간 밴드라는 키워드에 눈을 빛낸 여름이 운학에게 되물었다. 밴드부?!

 

​

 

"그럼 뭐 해? 진짜 만화에서처럼 막, 너희끼리 노래도 쓰고, 각자 세션 하나씩 맡아서 연주하고 그러는 거야?"

 

"네, 뭐.... 밴드부라면 그렇죠?"

 

 

 

그래도 저희는 커버만 하긴 해요. 진로 희망까지 음악으로 생각하는 건 저밖에 없어서.... 헤헤, 무구한 웃음 소리가 꼭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아이 같다. 귀찮은 어린애로만 보이던 운학이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우리 학교에 밴드부가 있는 줄 몰랐어. 에에?! 저희 새 학기 버스킹 안 보셨슴까? 대나무숲에 엄청 많이 올라왔었는데.... 여름이 머쓱한 기색으로 손가락을 달싹였다. 학교 대숲, 그런 거 잘 안 봐....

 

 

 

"무슨 노래 했어?"

 

 

 

나는 일본,

 

아니다.

 

고등학교 밴드부가 공연하는 음악이라고 해 봤자 데이식스나 루시 정도려나.... 아마추어 갓반인들이 결집되어 자기 만족에 가까운 콜라보레이션의 행태를 연주와 공연이라고 치부하는 단체일 것이 뻔한데, 괜히 심연을 드러내 보였다간 개쪽 못 면하는 거다. 직전 잔뜩 신나 눈에 이채를 띄우던 여름이 아냐, 고개를 떨구자 운학이 씨익 웃어 보였다. 요즘은 누나가 좋아하는 제이락도 완전 주류임다.

 

핸드폰 갤러리를 뒤져 공연 영상을 찾아 낸 운학이 주머니에서 한껏 꼬여 버린 줄 이어폰을 꺼내 아이폰 충전구에 꽂았다. 웬 줄 이어폰? 여름의 왼쪽 귀에 한쪽 이어폰을 꽂아 넣던 운학이 수줍은 듯 입꼬리를 꿈틀댔다. 아, 이거요.

 

 

 

"저는 이런 게 좋아서요."

 

 

 

책도 전자책보다는 도서관에 가득한 종이책이 좋고, 음악 들을 때는 핸드폰으로 그냥 듣는 것보다도 엄마아빠가 쓰던 MP3로 듣는 게 감회가 새로워요. 옛날 전자 기기는 에어팟 지원이 안 되니까... 줄 이어폰을 항상 갖고 다니는 편인데 이제는 적응돼서 이게 더 편해요. 남들은 중2병 같다고 뭐라고 하는데, 조금 오글거릴지라도 저는 이런 게 좋더라구요. 요즘 사람들 다 센치하잖아요. 그냥, 나라도 조금이나마 이런 거 기억하고 있으면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해서....

 

이런 게 뭐라고 조금 진지했나요. 죄송합니다. 운학이 뺨가를 긁적이자 푸핫, 여름이 가볍게 웃어 젖혔다. 죄송할 건 또 뭐야, 완전 웃겨!

 

 

 

"나랑 공유하는 세계가 비슷하네."

 

 

 

나도 너랑 비슷한 마음으로 도서부 들어왔어.

 

여름이 허리를 숙여 나무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잠깐, 잠깐. 이렇게 올려다보는 거...... 아무래도 위험하잖아. 언제 저만의 철학에 자신감이 따라붙어 떠들었냐는 듯 불쑥 가까워진 여름의 웃는 얼굴에 운학이 다시 한 번 귓가를 붉혔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면, 보여 주기 민망하단 말이야....

 

반대편 이어폰을 제 귓구멍에 꽂아 넣은 운학이 떨리는 심장께를 어루만지며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리얼충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제이팝 1위, 한치의 오차 없이 유우리 베텔기우스구나.... 무슨 기대를 해. 짐짓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여름이 영상 속 운학의 움직임에 신경을 기울였다.

 

턱없이 부족한 연습량으로 오합지졸인 합주에 보컬의 실력은 무자비할 정도로 엉망진창, 그런 난리통 속에서 음악에 관한 진지함을 잃지 않고 심혈을 쏟아 코드를 연주해 내려가는 운학의 모습이 반짝거렸다. 제 연주에 흠뻑 취한 퍼스트 기타가 곡의 흐름을 어지럽히며 홀로 달려 나갈 때 드럼보다도 묵묵히 중심을 잡아 주는 운학이 멋있어 보였다.

 

좋아하던 게임에서 조금은, 동경하던 열정파 캐릭터 같아서.......

 

그래서, 화면 속이 아닌 지금 제 눈앞에서 수줍어 마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마른 입가를 적시는 운학이, 마냥 말 많은 어린애 같아 보였던 김운학이...... 조금은 달라 보여서,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눈가에 호기심을 드리운 여름의 얼굴에 운학이 결심한 듯 여름의 손목을 붙잡았다. 베텔기우스 같은 노래, 진짜 제이락 매니아들한테는 형편 없을 수밖에 없잖아.... 야, 너 어디 가?! 잔뜩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운학을 쫓아 내려가던 여름이 삽시간 내로 불이 꺼진 밴드부실 앞에 당도했다. 여기서 뭐 어쩌려고.... 쉬잇, 입가에 검지를 갖다 붙인 운학이 주머니 속에 꿍쳐 둔 부실 열쇠를 구멍에 끼워 맞췄다.

 

 

 

문을 열자 게임 속에서만 접했던 장비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다. 스탠드에 거치된 일렉 기타와 베이스 기타, 검붉은 커버의 신디사이저, 매일 쉬지 않고 두들기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드럼에 보면대 두어 개....

 

먼 나라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꼭 게임 또는 만화 속 같은 기분에 둥그런 눈을 떠 보인 여름이 운학을 올려다보자 운학이 능숙하게 앰프에 기타를 연결했다. 짧은 튜닝 후 커다란 메신저백에서 분주하게 파일을 뒤적인 운학이 정신없이 악보를 꺼내 보면대에 설치했다. 누나한테는 이 노래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요....

 

숏츠에서 지겹도록 들은 일반인 픽 요아소비 노래였다. 메인 기타의 속주 라인이 아닌 코드만을 간신히 카피한 밤을 달리다가 밴드부실 내를 가득 채우자 한순간 멍해진 여름이 운학의 손끝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분명 즐겨 듣던 취향이 아닌 곡이었음에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의 출처는 어디인지, 새 학년 새 학기 첫날 도서관에서 느꼈던 그 충족감이 다시 한 번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왜인지. 건조한 지하 교실에는 버석한 햇살도 달콤한 봄 내음도 와 닿지 않았지만 운학의 연주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환경들을 형체로 표현해 주는 듯했다.

 

 

 

"누나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유명한 곡으로 연습했어요...."

 

 

 

많이 서툴었을 텐데, 아무래도 베텔기우스는 첫 공연이라 누나한테 들려주기 좀 부끄러웠어서요....

 

재차 붉어진 얼굴을 바닥으로 떨군 운학에 여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음표를 건넸다. 내가 일본 락 좋아한다고 해서 연습한 거야? 운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름이 다시 한 번 반문했다.

 

왜?

 

 

 

"반했으니까."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왜 연애 안 하냐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딱히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그래서 이런 마음 느끼는 거 누나가 처음이에요. 저 멋있게 봐 줬으면 해서, 성가시게만 느껴 주지 않았으면 해서.......

 

무턱대고 들이대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싫어요.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열심히 연습했어요.

 

꿈틀거리던 입매를 말아 내린 여름이 지긋하게 맞춰 오는 운학의 눈동자를 피했다. 갑작스러운 것 같아. 지금 당장 받아 달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해 보고 말해 줘도 돼? 여름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운학이 편안히 미소지었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면 내가 너의 세계로 갈게. 뭐든 괜찮다는 표정을 만들어 보이는 운학에 여름의 심장께가 욱신댔다.

 

 

 

 

 

 

 

 

 

 

 

키 크지, 잘생겼지, 심지어 밴드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 없는 김운학의 고백을 보류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말 그대로 갑작스러웠으니까. 더욱이 주변에 사람이 차고 넘칠 것만 같은 김운학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간 밑도 끝도 없이 부담스러워질 것 같았기 때문에. 평생을 다른 세계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순간의 감정으로 결속을 마음먹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음을 거절당했다는 패배감보다도 여름의 당혹스런 기색에 뇌리에 가장 먼저 치민 건 몰아붙였다는 죄책감. 난생 처음 열병처럼 찾아온 첫사랑에 그만 조급해져 버렸다. 연애 관계는 일방향의 마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닌데, 어쩌면 부담으로 와 닿았을지 모르는 일.... 다음날의 운학은 밴드부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절규했다.

 

사랑은 왜 이리도 어려울까요, 혀엉. 죽는 소리를 내며 늘어지는 운학에 릴스 스크롤 내리기에만 전념하던 동민이 동태 눈깔로 대꾸했다. 니가 혼자 80년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너무해! 누나는 이런 부분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요.

 

 

 

"그럼 매달려. 뭐가 문제임?"

 

"네?"

 

"니가 이번 공연 제이락 하자고 빡빡 우긴 것도 그 사람 때문 아니야? 걍 초대해."

 

 

 

딱 봐도 니가 무턱대고 들이대서 가벼운 마음인 줄 알았나 보지. 개열심히 연습해서 보여 주면 그 사람도 마음 바꾸지 않겠음?

 

뭐야.... 한동민 천잰가. 별종 보듯 동민을 응시하며 재현이 어깨를 떨어 젖히자 운학이 솔깃하는 눈치로 동민을 붙들었다. 어떻게 초대해요? 그냥 대뜸 가서 와 달라고 해요? ...... 니 알아서 해 ;; 난 그 사람 누군지도 모름 ;; 동민이 운학에게서 시선을 거두기 무섭게 밴드부실을 달려 나간 운학이 5층을 향해 내달렸다. 이제 도서관 가는 길은 눈 감고도 어림할 수 있었다. 적막을 깨고 나타난 운학이 도서관 문을 열어 젖히자 데스크 앞 하릴없이 앉아 있던 여름이 눈을 꿈뻑댔다. 뭐야?

 

노란 포스트잇 위에 서툰 글씨체가 꾹꾹 끼적여져 자리했다. 목요일 점심 시간 2층 강당. 여름이 당혹감 어린 눈빛으로 읊조렸다. 나 이날 도서자치위원회 있는데....

 

 

 

"꼭 와요."

 

"뭐?"

 

"누나 때문에 형들 우겨서 한 선곡도 있어요. 꼭 와야 돼요. 꼭이요!"

 

 

 

 

 

 

 

 

 

 

 

5층 도서관을 박차고 나온 여름이 2층을 향해 뜀박질했다. 강당이 가까워질수록 커다란 문 틈을 뚫고 나오는 베이스 소리와 함성 소리가 귓가를 가득 울렸다. 자치 위원회 활동을 휘몰아치듯 종료한 여름이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덧 마지막 한 곡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줄곧 강당 입구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눈치였는지 여름이 나타나기 무섭게 운학이 마이크를 쥐었다.

 

 

 

"드디어 마지막 한 곡인데요."

 

 

 

이거...... 꼭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형들한테 욕먹어 가면서 진짜 제가 엄청 우겼거든요. 노래도 노랜데, 이거 우리 밴드부가 하면 가오 제대로 구긴다고. 객석을 채운 학생들이 술렁이고 시작했다. 대체 뭐길래?

 

 

 

"아티스트명이랑 곡명을 절대 안 밝히는 쪽으로 합의 봤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럼이 킥을 밟자 강당 전체에 아니메틱한 전주가 울려 퍼졌다. 형편없는 실력의 보컬이 서툴에 일본어 가사를 짓씹기 시작하자 여름이 골 때린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멀찍이서 여름을 바라보고 있던 운학이 따라 미소짓자 하이라이트 부분을 향해 고조되는 흐름 속 퍼스트 기타가 애드리브를 시전했다.

 

아마도 전교에서 나와 너, 오로지 둘만 알고 있을 공연곡.

 

나의 안위가 중요해 언질조차 주지 않은 곡을 찾고 찾아 헤매며 단체 공연 자리를, 역사에 다신 없을 프로포즈 자리로 만들어 버린 김운학.

 

이마를 짚은 여름이 커다란 입모양을 만들어 무대 위의 운학과 진득하게 시선을 맞췄다.

 

알

 

겠

 

어

 

피크를 감싸 쥔 운학의 스트로크가 거세지자 객석을 채운 여학생들이 혼절하며 별안간 고함을 내질렀다. 운학이 여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차원을 넘어선 이방인의 엽기적인 헌정 공연, 이토록 취향 맞춤형인 구애라면 모른 척할 수가 없잖아....

 

 

 

 

 

 

 

 

©︎ 메로코 님